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평소 시와 가깝게 지내진 않지만, 그래도 가끔가다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어본다.
이성복 시인의 시어들은 난해하지 않지만, 시어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의미들은 평이하게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한용운의 시인의 시처럼 다르게 읽힌다.
교과서에선 보통 이 시를 '백일홍에 빗댄 생명력과 절망의 극복'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일반적인 감상으로는 연애시로 감상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엔 이 시를 예전에 읽었을 때는 마지막 구절인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는 진술을 통해 절망이라는 것은 언젠가 끝난다는 해석을 했다.
하지만 요즈음 이 시를 다시 읽어보니 다른 시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혹자는 이 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백일홍'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은 '여름'이라는 시간성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백일홍이라는 소재는 물성 그 자체에 집중한 소재였다기보다, 말 그대로 '백일 동안' 붉게 피는 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제목도 '백일홍'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여름'을 언급하고 있다.
'백일'은 약 삼개월로서 여름이 되고 난 뒤 삼개월의 시간은 가을이다. 그리고 '가을의 시작'은 '여름의 끝'이기도 하다. 결국 같은 의미의 다른 진술이 이 시의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의 다른 제목은 '그 가을의 시작'.
1연에 등장하는 '그 여름'은 계절의 시간성을 드러내는 '여름'이다. 그리고 그 여름 동안 백일홍은 무사하게 피었고, 종내 붉은 꽃을 피워냈다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2연에 등장하는 '그 여름'은 '나'와 결부되어 계절의 시간성보다 '삶의 시간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 삶의 시간 속에서 여름은 생애의 젊음과 청춘을 의미한다. 2연의 여름을 생애의 시간성으로 해석을 해야 2연 2행에 제시된 '장난처럼'이라는 수사에 대한 실마리가 풀린다고 생각한다.
왜 하필이면 절망이 장난처럼 꽃을 매달았다고 했을까. 그건 치기 어린 청춘의 절망은 '심심풀이와 재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서툰 젊음의 장난질이라고 본 것 아니었을까. 열병처럼 앓던 사랑의 신열도, 세상의 벽 앞에서 느끼던 좌절감도 그 모든 한떨기 절망은 가을에 들어선 자에겐 한낱 '장난처럼' 보일 테니까.
결국 3연에 '넘어지고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연달아 등장하는 과한 ㅁ, ㅃ, ㅂ 의 파열음의 연속은 꽃잎이 터져 마당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음상으로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렇게 흐드러지게 떨어진 꽃잎들이 마당을 뒤덮는 그때가, 바로 '그 여름의 끝'이자 '그 가을의 시작'이 되는 때이다. 폭풍이 지나간 그 자리, 가을의 초입에 서서 우두커니 바라본 내 청춘의 백일홍들, 폭풍도 떨구지 못한 그 붉은 절망들은 시간이 흘러 '장난처럼'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청춘과 여름이 끝나며 나의 절망도 끝이 난다.
얼마 전 나의 청춘 시절을 함께 한 지인과 함께 술 한 잔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절망들은 얼마나 절실했나'에 대해서 생각하다, 그 절망들을 그제서야 장난처럼 말하는 나를 발견했다.
밤도 깊어갔고, 가을도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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